“‘비움과 채움’의 미학적 사고와 더불어
물질계와 정신계가 함께 어우러진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을 대형작품(5m)작품으로
선보이는 열정적 작가 이렬 작품전”
작가 이렬(본명 이창렬)의 근작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정립’이라는 기조아래 ‘정체’과 ‘국제화’를 목표로 진행되었던 단색화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는 계명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여섯 번의 개인전과 국내 주요 아트페어 참여를 통해 자기만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펼쳐오고 있다. 대백프라자갤러리 초대전으로 마련되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다양한 실험과 반복된 조형작업을 통해 단색으로 채색된 균일한 화면과 다양한 표면을 만들어 조형적 단조로움에서 탈피한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5m 초대형작품을 비롯해 2m 규격의 작품 30여점을 통해 새로운 조형어법을 소개하는 이번 작품전은 오는 5월 30일(화)부터 6월 11일(일)까지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마련된다.
올해로 7번째 개인전을 마련하는 이렬이 대구화단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미술대학 졸업 후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일깨우는 정제의 시간은 현재 그를 있게 한 과도기로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 동구 율하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가구공장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목재용 선반과 도장실 등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 있어 2m가 넘는 대형 작품들도 거든히 소화해 낼 수 있다. 그의 근작은 규칙적인 간격의 선형 입체물 위에 단색 아크릴 물감으로 도색한 부조 회화이다. 마치 우리나라 1세대 단색회화의 거장인 박서보의 ‘직선 묘법’과 유사한 형태에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e) 운동의 선두에서 혁명적 활동을 지향했던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를 연상케 하는 단색조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천천히 살펴보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열된 선형의 입체물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 패널에 두툼한 시트지를 오려 붙여 빳빳이 세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정교함이 느껴지는 작품을 통해 제작기법과 재질, 채색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강하게 증폭된다. 기하학적 틀 속에 일정한 크기의 선들이 운집된 입체적 조형물과도 같다. 크고 작은 기하학적 형태를 위아래로 양분화 시키고 윗면을 다시 일정한 간격의 선형입체로 오려내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은 작가만의 노하우로 일궈낸 실험의 결과물인 셈이다. 조형의 기본요소인 기하학적 선과 면을 통해 형성된 논리적 관계성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입체적 구조와 결합해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는 평면 회화가 갖는 환영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재성을 드러내는 부조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채색된 화면은 강한 인상을 더 해준다. 청명한 느낌과 부조 회화의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은 그의 작품을 대표하는 색채인지도 모른다. 명도가 낮고 채도가 높은 군청색의 일종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값비싼 색으로 평가받아 오는 울트라마린은 안료의 희소성만큼이나 예술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반복된 노동과 재료적 물성, 색채의 에너지가 한데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현대 추상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작가 이렬은 동·서양 미술사에서 정해진 회화의 법칙을 무작정 답습하기보다는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모색하고 변화를 추구해 나가려는 실험정신을 현대회화의 진정한 본령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연작 「appearing plane」은 회화의 평면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적 일루젼에서 벗어나 공간적 평면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 자세에서 비롯된다. 이는 평면성 그 자체의 개념에서 시 지각과 관계하는 빛과 색 등 기본요소가 결합해 새로운 조형 이미지를 연출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이 면과 관계하는 순간은 평면적 시각에 잠재된 공간의 확장으로 이어져 입체를 현실적으로 재현한다. 오늘날 디지털 환경은 현대회화에 크고 작은 변화를 주고 있으며, 각종 문양과 기호에 의해 인지하고 판단하는 지각 활동은 개념적이고 입체적인 시각예술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상품관리를 위한 디지털 기호인 바코드를 세워놓은 것과 같은 형상에서 현대적 조형미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정형화된 선형의 이미지 이면에 물질의 외형만을 쫓아가는 현대사회의 모순도 함께 담겨있다.
19C 말 인상주의 색채에 대한 새로운 미학이 시작되며, 서양의 미술 양식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재현의 목적이 아닌 회화의 표면을 물질로 보고자 하는 움직임은 물감의 사용 확대로 이어졌고, 평면을 평면 자체로 인식하고 물질화하는 인식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1950-60년대에는 다색화에 대비하여 단일한 색조로 명도와 채도를 바꾸어 그려낸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단색화)가 새롭게 등장했다. 조형의 구성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평면의 절대성을 강조한 회화였다. 이처럼 서구의 모더니즘의 대표적 양식인 미니멀 아트가 사물 자체로의 환원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갔다면, 1970년대 우리나라의 단색화는 비 물질화를 통한 정신적 차원을 추구함으로 회화의 독자성이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평면이라는 회화의 근원 조건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 정신성으로 접근함으로써 우리의 단색화는 평면이라는 구조적 형식과 동양적 정신성을 모두 담아내며 차별성을 보여 준다.
작가 이렬은 이러한 서구의 모노크롬과 우리의 단색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조형 양식을 개척해 나가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만의 독자적 주제의식으로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형상화 시켜 나가는 것이다. 여백과 형상, 혹은 허구와 실체, 소통과 단절, 빛과 어둠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 작가의 미의식이 결합하여 독창성을 더 해준다. 비움은 실재하는 것과 부재한 것의 경계에서 상호 간의 어울림이 가능하도록 하는 열린 바탕이 된다. 그 비워진 바탕에 실재와 부재의 의미가 함께 담김으로써 공간이 갖는 시각적 차별성은 더욱 확연해진다. 그의 작품에는 분리된 간격에 따라 네거티브공간(Negative space)과 포지티브공간(Positive space)이 성립된다. 비움의 형성순서에 따라 화면을 수직과 수평으로 구획한 후 평면 위에 정형화된 형태의 사각 목재를 고정시킨다. 장시간 압축공정을 거쳐 평면과 형태로 구분되고 다시 큰 형태는 평면에 우뚝 솟은 채움이 되고, 이는 선반 작업을 통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틈을 만들어내며 하나의 구조물이 된다. 이는 포지티브적 채움에 또 다른 비움을 의미하는 공간적 확장을 가져다주며 네거티브적 비움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서로 다른 공간들 사이에는 하나의 긴장이 형성되고, 그 긴장은 공간 상호 간에 이완작용 또는 하나의 연속된 공간으로 확장된다. 선형의 구조물은 빛을 통해 조형적 의미를 가지게 되며, 빛은 어둠을 통해 지각 되어져 비가시적인 영역을 보여준다. 나아가 부단히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의 모양에 따라 작품은 시시각각 형태의 변형 속에서 또 다른 잔상을 남긴다.
끝으로 작가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적 사고와 더불어 물질계와 정신계가 함께 어우러진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이 작품에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장자의 물아일체는 객관적 세계의 모든 대상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가 어울려 하나가 되는 사상으로 자신의 작품에 내재한 회화의 본질을 넘어 물성의 본질에 끝없이 집중하려는 작가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회화 본연의 문제를 파고들면서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서구식 모더니즘에 벗어나 동양적 사고에서 비롯된 개념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렬은 이러한 미의식과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조형 언어를 개척해 가는 작가이다. 아직은 탁월한 조형적 감각과 고강도의 노동에서 얻는 작품들이 저평가되는 한계점은 인정된다. 하지만 하루 10시간에 이르는 창작시간과 엄청난 작업량은 청년작가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다고 본다. 도전의식으로 무장된 그의 열정적인 작가정신은 지역 미술계에 커다란 울림이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