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에 계곡의 조약돌과 맑은 물이 가득하고,
그 위로 송사리들이 계곡물 안팎을 오가며 유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막을 무심코 벗어나는 현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서양화가 서보권의 아홉 번째 개인전 개최”
작가 서보권이 지역 화단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건 2010년을 즈음해 미술 단체와 개인전을 열면서이다. 미술대학 졸업 후 그는 사회생활을 통해 만들어진 삶의 방식과 나름 자기만의 속도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 나갔다. 자신에게 작가 활동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하루하루의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회에서 얻은 성실함을 밑천으로 작품 활동을 새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성실한 삶의 태도는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사실적 기법을 통해 사물의 재현이 주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기법은 화단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 대상이 담고 있는 시간성과 공간성, 기억과 감정까지 복합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감동과 즐거움을 전해 주었다. 한국 구상회화의 흐름과 특색을 탐색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실성을 재구성하려는 그의 열정과 노력은 이제 천천히 결실을 맺어 간다.
그는 평소 포도를 정물화를 즐겨 그려왔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는 길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 송이에 열리는 무수한 포도알은 자손의 번창을 의미하며 서양에서는 생명과 풍요, 문화적 번영을 나타냈다. 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무와 열매 중 하나가 포도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 포도송이의 풍성함과 포도 덩굴의 왕성한 생명력을 전통 수묵화로도 표현해 왔다. 작가 서보권 역시 이러한 포도의 상징성을 함축적으로 담은 극사실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 미의식을 표출해 오고 있다. 사실성이 갖는 완결성보다는 빛과 색채에 의해 대상을 재해석하려는 강한 의지가 사진이 갖지 못하는 회화적 감성을 확장 시켜 내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을 통해 감상자는 작가의 감각적 공간 속에서 평안함을 얻게 된다. 그에게 사실성은 대상을 고스란히 화면에 옮겨내기보다는 존재의 실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재현의 의미를 달리 부여해 회화적 감각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테이블 바닥과 수평으로 정하고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주제가 갖는 조형적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켜 나간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는 고전적 재현의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깊은 사색과 반복된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전적 개념에서 사실적 재현은 주체의 개입이 배제되고 가시적인 현실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지만, 현대미술에 있어 재현의 개념은 주체인 작가의 인식활동을 통해 대상의 주관적 변형 과정을 거친다. 의식의 주관적인 표상활동과 주체의 주관적 심상에 의해 단순히 대상과의 닮음을 넘어서서 비가시적 감성이나 주관적인 내면정서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관적인 내면은 사실적인 재현의 방법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또한 작가 서보권의 회화적 특징 중 하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조각난 일상의 이미지를 계곡과 헤엄치는 송사리들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표현양식과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계곡풍경 이미지는 작가의 감정이입을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해석되고,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기억 너머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는 감정을 회화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구, 의도, 인식 등을 표면화 시켜 캔버스 속에 하나의 환영으로 존재시킴으로써 억압에서의 해방을 통한 치유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in the lord)에서 보호 받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메타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캔버스 위에 계곡의 조약돌과 맑은 물이 가득하고, 그 위로 송사리들이 계곡물 안팎을 오가며 유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막을 무심코 벗어나는 현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송사리들을 통해 종교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초현실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무의식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로 나타내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가 된다. 무의식 안에 내재되어 있는 기억들과 경험들을 시각화 시켜서 화면에 새로운 공간과 세계를 창조해 내는 화가는 그래서 늘 전위적인 존재이다. 개인이 태어난 이후로 눈으로 본 환경들이 경험이 되어서 인간의 무의식 속에 끊임없이 쌓이게 된다. 이렇게 무의식속에 쌓인 기억의 파편들이 서로 재조합되고 응용됨으로써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화가에게 시각적인 경험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작가 서보권이 마련하는 예술세계 역시 이런 기억과 경험이 만들어낸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적 재현을 바탕으로 우연과 환영, 환상, 꿈과 같이 정신에 의해 새롭게 포착되어지는 조형적 전환을 꾀하는 그의 행보에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끝]